진행: 김소언 기자 / 취재: 편수민PD
【단박인터뷰】
광주 월곡동 고려인 마을에는 고려인 마을 특화 거리가 조성돼 있는데요. 이곳은 우리 선조들의 독립전쟁 역사와 문화, 생활사 그리고 중앙아시아 강제이주사 등을 엿볼 수 있는 고려인 문화관 등이 있습니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미술 거장인 고려인 3세 화가 문 빅토르씨가 광주의 작은 미술관을 열었는데요. 오늘 단박 인터뷰에서는 편수민 PD가 문 빅토르 화백을 직접 만나고 왔습니다. 문 화백의 작품과 활동 소식 등을 알아보죠.
지금 편수민 PD 나와 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 네, 안녕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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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론보도 등에서 문 빅토르 화백을 카자스흐탄을 대표하는 화가이며, 세계적인 미술 거장이라고 소개를 하던데요. 청취자 분들이 좀 더 와 닿게 구체적으로 어떤 분인지 자세히 소개를 해주시겠습니까?
-네, 고려인 강제이주 첫 도착지인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서 1951년에 태어난 문 빅토르 화백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를 비롯해서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일본 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개인전을 가졌고요.
대표작으로는 ‘1937 고려인 강제이주열차’, ‘홍범도 장군’등이 있습니다.
또, 문 화백의 그림 중에서 <고갯길>이라는 작품은 카자흐스탄 대통령 집무실에 걸려있고요. 카자흐스탄 국립미술관 카스티프에도 그의 작품 4점이 소장돼 있다고 합니다.
2. 대통령 집무실에 아무 작품이나 걸지 않지 않습니까. 문 빅토르 화백이 어떤 분인지 미루어 짐작이 가는데요. 그런데, 문 화백의 경우 고려인 3세로 카자흐스탄에서 나고 자란 것으로 압니다. 통역이 필요하진 않았나요?
-네, 저도 그 부분을 걱정했는데요. 살짝 발음이 부정확하거나 가끔 제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긴 했지만 얼굴을 마주보고 의사소통을 하는데 크게 불편함은 없었습니다.
문 빅토르 화백의 말을 지금 직접 들어보시죠.
#CUT_1 문 빅토르 화백 인사
<예 반갑습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고려인 3세 카자흐스탄에서 태어난.. 화가 문 빅토르 입니다. 옛날에 그 구소련에서 제일 먼저 그 기차(고려인 강제이주 열차)..1937년에 기차 태우고 보내는 도시 거기에는 우슈토베에서 저는 1951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래도 우슈토배는 도시도 있고, 기차도..우슈토베 역도 있었습니다. 근데 그쪽에서 한국인들 거기에서 안 버리고 저 멀리 저 시골에... 아마 30km정도.. (고려인들을) 또 차에 태우고 거기를 들어가서 거기에서 버렸습니다. 사람들 못 보게(고련인들을 강제이주 해서 척박한 땅에 버리는 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그러니까 그 시골에서 저는 거기에서 태어나고 거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거기에서 살다가 1969년에 제가 알마티 그때 수도 알마티에 넘어가서 거기에서 공부하고 거기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아니 한국 이름 없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3세니까 우리 할아버지도 러시아 이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서 러시아 사람들은 한국어 말 모르고 한국 이름을 못 말하니까 다 러시아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런데 성은 놔두고 김 씨, 박 씨, 이 씨..나는 문 씨, 그런데 이름은 빅터, 글라지밀, 안드레아, 세르게이 그렇게 다 바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고려인 3세 그리고 또 4세, 5세... 다 러시아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제가 '남평 문' 씨 예요. 그러니까 우리..이 우리 성 '문'씨.. 여기 고향이예요.
이쪽에서 남평 문 씨 ....
(유창한 러시아 말~~~) 이거는 내가 한국말로 다시 말하는데, 우리 고려인들을 여기서 한국에 와서 일하면서 한국말 잘 보유하고 공부하라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어머니가 그리고 그 옆에 사는 할머니들, 할아버지들이 다 한국말 하니까 난 조금 듣고 그렇게 조금 기억하고 그리고 그렇게 조금 알고 있습니다.> [참고] 문 빅토르 화백은 러시아말을 유창하게 하고, 카자스흐탄 말은 러시아말보다는 덜 유창하지만 듣는 것은 더 잘 들으신다고 함. 한국말도 어려운 용어가 아니면 대부분 알아들으셨고 말할 수 있으셨음.
3. 문 빅토르 화백이 남평 문 씨군요. 사실 고려인 2세도 아니고 3세라고 했을 때 약간 거리감이 느껴졌는데요. 남평 문 씨라고 말씀하시니깐 역시 한 뿌리의 같은 민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문 화백은 언제 처음 할아버지의 땅인 한국에 정착을 생각하고 또 결심하게 됐는지도 궁금합니다.
-네,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문 빅토르 화백과 우리나라의 인연이 깊더라고요. 88서울올림픽이 있었던 다음해에 한국을 처음 방문한 뒤에 여러 차례 걸쳐서 전시회를 가졌다고 하는데요.
문 빅토르 화백의 음성으로 지금 직접 들어보시죠.
#CUT_2 한국과의 인연과 정착
< 제일 먼저 1989년에 우리 고려인들 대표들을 다 모아서 모스크바에서, 다스켄트에서, 러시아에서, 한 비행기를 우리를 다 싣고 한국으로 왔습니다. 그때 88 올림픽 기념이었습니다. 그때 그 기념 때문에 우리 처음 서울로 왔어요. 그때부터 몇 번 또 한국으로 계속 많이 왔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깊은 시골에서 살고 그리고 카자흐스탄에서 살다가 또 이렇게 큰 나라의...그런 서울에 그렇게 깜짝 놀랐습니다. 집도 크고 그리고 좋은 호텔..제일 좋은 호텔, 그때 롯데 호텔에서 우리 살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거기서 음식도 먹고 레스토랑, 이렇게 내가 어디 상점, 그리고 마트, 백화점 들어가면 옷도 많고 그리고 어디 가면 식사... 너무 많이 있으니까 깜짝 놀랐지 우리는 카자흐스탄에서 그렇게 많이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가 와서 아! 여기 우리 역사 나라이다~ 역사 고향이다~ 하고 잘 살았다고 그런 느낌이 있었습니다.
1989년에 그때 서울 와서 서울에서도 광주까지 우리 버스 타고 왔다 갔습니다. 그때 초대받아서 여기에서 광주에서 문화재단(금호문화재단)이 있었습니다. 그때 거기서 전시를 했습니다. 2014년에 제가 또 광주를 왔거든.. 광주에서 우제길 미술관이라고 전시를 하는데, 그때 우리 고려인 마을 회장 신시나이다(신조야).. 다 만나서 그때 제가 만나서 말했습니다. 신조야! 여기서 이렇게 좋은데, 나도 여기 와서 살 수 있는가? 하니까..신조야(가) 오라고 오라고~ 우리 모두가 돌봐주겠다 하고..
그래서 카자흐스탄 와서 계속 생각했습니다. 살자~ 그림도 그리고 뭘 어떻게 좀 살 수 있는가?...여러 가지 지금 많이 생각하고.. 지금 나이가 72살이지.. 그러니까 화가는... 자기 그림들 어디 보여주고, 그리고 마지막 죽은 다음에 그림들을 어디에서 놔둔가 그런 걱정 하지요. 우리 딸들 둘이 있는데..다 외국 가서 있고, 또 화가들이 아니니깐... 그래서, 여기서 한국에 나의 작품들... 어떤 자그마한 박물관에 아니면, 어디에 맡겨 놓으면 아주 좋겠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4. 지난 1일이었죠? 3월 1일..삼일절에 광주 광산구 월곡동에 위치한 고려인마을에서 ‘문빅토르미술관’ 개관식이 있었죠?
-네, 개관식에는 박병규 광산구청장, 고려인마을 신조야 대표를 비롯한 홍인화 전 5.18민주화운동기록관장 등이 참석해 문빅토르 화백의 고려인 마을 정착과 미술관 개관을 함께 축하해줬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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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3월 1일, 삼일절에 맞춰서 개관한 '문빅토르 미술관' |
‘문빅토르 미술관’은 광주고려인마을지원센터 2층에 위치해 있었는데요. 주거공간과 작업실, 전시실을 함께 있었고 생각했던 것 보다는 아담했습니다. 그래서 광주고려인마을은 문 화가를 지원하기 위한 모금 운동을 전개해 새 미술관을 건립해 운영한다는 계획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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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문빅토르 미술관'은 주거공간, 작업실, 작품실이 함께 있는 아뜨리에 형태로 그 규모가 크지 않다. 고려인마을에서는 후원금을 모아서 좀 더 큰 미술관 개관을 준비중이라고 한다. 응원합니다. 화이팅! |
관련 내용 문 화백의 목소리로 들어보시죠.
#CUT_3 문빅토르 미술관
<예 글쎄요. 그러니까 앞으로는 제가 작품들을 많이 계속 하고 있으니까 여기에서 지금 아뜨리에의 작업실이 조금 작아요.
그림 하나 정도 그릴 수 있는 공간인데, 앞으로 그림들 100개 나오면 여기에 두기 조금 어렵죠. 그러니까 어디에서 앞으로 조금 그림들 많이 그리고, 많이 걸어놓고, 사람들 많이 와서 좀 구경하도록 좀 도와주시오~ 그렇게 말했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고려문화센터에서.. 화가도 있고 시인도 있고 그러니까 그것도 좀 보여주고, 그러니까 거기서도 그림 그리고.. 우리 고려마을 사람들이 와서 구경하고 그럼 하면 좋습니다. 그러니까 앞으로 그렇게 되겠죠. 글쎄 그렇게 많이 오면 좋죠.
그러니까 제 생각에는 그 2년 정도..3년 정도.. 계속 그림들 많이 그리고, 선생님 처럼 인터뷰를 해주고... 광고 도움이 되죠.
그러니까 사람들은 아마 저기서..고려 무슨 그림들을 그린다~ 좀 보고 싶다~ 하면 좋죠. 그렇게 좀 노력하고, 그런 게 좀 시간이 걸립니다. (사람들에게 알려져서 미술관이 자리 잡게 될때까지는 2~3년 정도 걸리고, 많이 알려지고 발전할 수 있도록 그림도 많이 그리고 더 노력하겠습니다.)
4. 문 화백의 작품을 실제로 보니깐 어떻든가요?
-네, 전문가들은 문 빅토르 화백의 화풍이 섬세한 점묘기법과 다채로운 색감 표현력을 누구도 흉내내기 어려운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들 말하는데요. 저는 전문가는 아니었지만 굉장히 세련되고 앞서간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흔히들 폼은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하는데요. 문화백이 51년생으로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소위 말해서 요즘 MZ세대에게도 통할만한 작품으로 보였습니다. 소장욕구를 부른다고 할까요? 하하
그리고, 흔히 화가의 작품에는 그 사람의 인생이 담겨 있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신의 뿌리를 찾는 본능의 시도가 자연히 화폭으로 옮겨졌다는 느낌도 받았습니다. 가야금을 연주하는 여인을 그린 작품도 눈에 보였고요. 고려인들의 강제이주
아픔을 담은 강제이주열차에 대한 작품도 만나볼 수 있었는데요.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문 빅토르 화백의 말로 직접 들어보시죠.
#CUT_4 문빅토르 작품 세계
<이거는 지금 10% 시작이에요. 10%.. 완성은 아직 멀어요.그러니까 가야금 하고...그 추상으로.. 가야금, 여자, 이 악기를 가지고 이렇게 당당 노래한 그런 뜻이야.(여인이 가야금을 연주하는 그림)
-18만명의 고려인들이 1937년 영문도 모른채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스탈린에 의해 시베리아 화물열차에 실려 중앙아시아 등으로 강제이주를 당했는데요. 사람들을 강제이주 시키는 모습을 모이지 않기 위해서 주로 밤에 움직였다고 하고요. 화물열차여서 화장실이 없는 열악한 환경이었기 때문에 중간중간 정차해서 남녀가 다른 쪽 방향으로 해서 볼일을 봤다고 합니다.
1937년의 일이었고 강제이주를 당한 후 1951년에 문 빅토르 화백이 태어났기 때문에, 강제이주를 직접 당하지는 않았지만 그때의 그 고생담을 주위 분들에게 많이 들어다고 해요. 그래서 간접경험을 토대로 열악한 화물열차에 실려 강제이주를 당해야 했던 고려인들의 아픔을 담은 작품을 만들었다고 하는데요.
해당 작품을 잘 보면 그림 속 여러 인물들이 안경을 쓰고 있는데, 강제이주을 감추려고 고려인들을 밤에 이동 시키거나, 사사람들이 보지 못하도록 통제 했지만, 사실 모든 사람들이 다 보고 있었다는 의미를 작품에 담았다고 합니다.
1937년 낯선 땅에서 영문도 모른채 강제 이주를 당해야 했던 고려인이 아픔이 담은 작품에 대한 해석을
문 빅토르 화백의 말로 자세히 들어보시죠.
#CUT_5 강제이주열자 작품해설
<이거는 37... 강제 이주 1937년, 우리 어머니가 그 기차(고려인 강제이주 열차) 타고 왔거든. 그러니까 그거 기억하고 그런 거 가지고 이 작품을 했습니다. 보인다. 사람들 이렇게 보인다. 기차가 지나간 그런 뜻이에요.
글쎄요. 여기는 또 열차 기차 그림 그리고 있는데 그런데 저는 그 기차 타고 못왔어요. 나는 그때 세계에 없었거든. (태어나지 않았거든요) 나는 1951년에 태어나니까..그러니까 역사를... 어떻게 사람들은 기차 타고 고생하면서 이렇게 왔는데도 그걸 못 봤거든요.그러니까 추상으로, 판타지로 하면서리..그림 그림입니다.
어떻게 사람들..여기서 그 기차 타고 왔는 지 알아봤더니, 석 달 기차 타고 왔거든.. 왜 이렇게 석 달은 어제 왔는가 하니까, 그 기차 옛날에 그 소 돼지 그런 기차를 태웠는데(화물열차를 태웠는데) 거기엔 화장실이 없어요. 그러니까 기차 가다가 딱 세우고, 여자들 왼쪽~ 남자들 오른쪽~ 그리고 반시간 딱 세웠다가 또 가고, 그리고 죽은 사람들 또 어디에서 내려오고(사망한 사람들은 열차 밖으로 보내고) 그러니까 그 하바롭스크, 블라디보스톡..그쪽에서 카자흐스탄까지 석 달걸려서 왔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생각하고 아 어떻게 그렇게 사람들을 고생하고 왜 그렇게 보냈는가? 그런 느낌이 가지고 앞으로도 조금 많이 작품들 하자고 지금 생각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그 큰 역은 낮에 금방 지나가고, 그리고 밤에는 도시를 지나갈 때 사람들 못 보게 하거나 딱 못 지나갔어요. 딱 밤에 보내고 낮에는 사람들 못 보게... (고려인들이 열차를 타고 강제이주 하는 모습을 주위에 알리지 않으려고 했는데)
하지만 그럼에도 불고 하고 나는 이 사람들을 본다 그런 뜻이 그런 생각하고 하는데....
*** 고려인 강제이주 정책의 참혹함을 주위에 알리지 않으려고 소련 정부가 기차 이동을 통제하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게 했지만 사람들이 그 모습을 다 봤고 지금도 문화백이 알리고 있다는 의미를 담아서 작품 제작.
[참고] 고려인강제이주: 1937년 소련의 극동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고려인 약 172,000명이 스탈린의 명령으로 인하여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적으로 이주된 사건.
5. 러시아와 카자흐스탄 등에 고려인 화가들과 우리나라와의 문화 교류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마중물 역할을 하는 것이 문 빅토르 화백의 작은 소망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고국에 할아버지의 땅에 영구 정착하게 된
문 빅토르 화백의 소박하지만 원대한 꿈, 지금 함께 들어보시죠.
#CUT_6 문화백의 바람
< 그러니까 여기에서 한국 에서 의 무슨 꿈(이 있냐고 하면은) 그저 작품... 좋은 작품 많이 하고, 그리고 갈레리(galerie /화랑, 진열실)에 내 그거... 내가 큰 화가 다~ 그런 생각은 없고, 그저 갈레리 (galerie)에 있으면..우리..내 작품들을 보여주고, 그리고 우리 카자흐스탄에서 고려인 화가들.. 나 말고도 또 몇명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와서 여기 전시를 하고 그리고. 러시아에서도 화가들... 원래 그림 을 한 대학도, 상트페테르부르크... 모스크바... 좀 힘있는 좋은 화가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도 와서 여기서 보여주고, 화가들 와서 자기 작품도 들어와서 보여주고 그러면 좋죠. 그렇게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다.
6. 문 빅토르 화백이 고국땅에서 앞으로 그려내는 작품들이 대한민국의 소중한 문화 자산이 되어서, 전 세계 방문객들의 오감을 사로 잡았으면 좋겠네요.
-네, 그리고 문 화백의 작품을 통해서 고려인들에 대한 시선도 보다 더 따뜻한 눈길로 이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네, 오늘은 여기까지 이야기 나누겠습니다.
좋은 말씀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사~~~)
TMI 광주 월곡동 고려인 마을에는 '문빅토르미술관' 근처에는 '월곡 고려인 문화관'도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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