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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첩/그라시아가 만난 사람들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팀

by 두근두근 그라시아 2024. 8. 5.

 
 

 

 진행: 김소언 기자 / 취재: 편수민PD
 
【단박인터뷰】  2024년 7월 31일 수요일 방송 
 
함께하는 세상 오늘에서는 연해주 이주 160년을 맞아 연속 기획 인터뷰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오늘 단박인터뷰에서는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을 찾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김재기 교수팀을 PD가 만나봤습니다. 지금부터 들어보시죠.
 
(현장음) 사랑하는 내 친구~~
우리 학생들이 여기로 오세요~
보세요! 하나 둘 셋

 

 
*우리 지역의 전남대 학생을 이 고려의 마을에서 만나보겠습니다. 안녕하세요?
 
- 안녕하세요 전남대학교 학생 유원형입니다.
 
*친구들하고 같이 오셨는데 팀장이시라고요?
 
- 네 맞습니다.
 
*무슨 팀이에요?
 
- 고려인분들 중에 조상님이 독립운동을 하셨지만 서훈 등을 못 받으신 분들이 굉장히 많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걸 좀 발굴을 해서, 발굴을 하면 이제 또 그 후손들이 대한민국 국적을 또 쉽게 가지실 수 있어서, 그걸 좀 도와드리고자 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9명이서 진행을 하는데 이제 오늘은 시간 관계상 4명만 온 상황입니다.
 
*고려인마을에 오셔서 어떤 것들을 느끼고 계세요?
 
- 그분들이 이제 한국말을 못 쓰시고 보통 러시아어 말을 쓰시는데 이제 왜 한국말 대신 러시아 말을 배우셨는지에 대한 조금 안타까움 그런 걸 좀 느끼게 되었습니다. 또 우리나라의 안타까운 비극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그런 거를 깨달았던 것 같습니다. 네, 보통 그 김치 같은 것도 고려인분들은 당근으로 담그시는데 그런 것도 되게 조금 비슷하면서 어떤 때는 좀 다른 모습이 되게 신기한 것 같습니다.
 

- 네, 저는 전남대학교 2학년 재학 중인 이해인입니다. 저희 저번 주에 처음 방문해서 고려인들이 어떻게 지내는지에 대해서 알아보는 시간을 가져봤습니다. 똑같은 광주 내에 있는데, 다른 언어들이 간판에 써있는 걸 보면서 아 이 속에서 정말 고려인들이 지내는 곳이구나라는 걸 새롭게 느끼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 네 안녕하십니까? 저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3학번 전익성입니다. 친한 교수님께서 한번 해보라고 해주셔서 좋은 경험과 활동이 될 것 같아서 신청했습니다. 한국에 오셔서 자신의 고향에 왔다는 느낌이 들고 자신들을 이렇게 포옹해 줄 수 있는 다양한 복지 시스템..? 그것을 누리면서 정말 행복한 생활을 보내셨으면 좋겠습니다.
 
- 전남대학교 22학번 이해관입니다. 여기와 관련된 건 아닌데.. 학교 교육 현장에서 고려인과 일반 한국인들 간에 이렇게 접점이 많이 부족하다고 들었습니다. (서로간에) 그런 접점을 통해서 보다 더 한국 사회에 더 이렇게 잘 섞였으면 좋겠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자료가 너무 부족하다 보니까 사실적 기반에 의해서 연구 활동하기에는 많이 부족한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앞으로 더 열심히 노력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
 

*네 이번에는 고려인들의 뿌리 찾기,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를 직접 진행하고 계시는 교수님을 만나보도록 하겠습니다.
교수님 만나 뵙게 되어서 반갑습니다.
 
- 네,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전남대 정치외교학과의 김재기 교수입니다. 올해가 이제 2024년이 러시아로 한인들이 이주한 지 160주년이 되는 아주 뜻깊은 해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뜻깊은 해외 고려인 동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게 되어서 기쁘게 생각하고요.

저는 전남대학교에서 국제지역 분쟁론, 디아스포의 정치 경제 또 북한 정치론 등을 강의하고 연구하고 있습니다. 제가 고려인 동포에 대해서 이제 연구를 하게 된 게.. (제가) 대학 4학년 때가 1991년도거든요. 그때 운 좋게 소련을 갔어요. 그런데 92년도에 소련이 사라지거든요.
 
붕괴되는데 그래서 모스크바와 제가 지금 상트페테르부르크.. 그런데 그때는 레닌그라드라 했거든요. 그런 지역을 갔었고, 모스크바 공립대학에서 고려인 교수를 만났어요. 박미하일 교수님.. 이제 돌아가셨습니다마는 그래서 그때 고려인이라는 존재를 알았고 그 이후로 이제 90년대 중반부터 중앙아시아 그다음에 러시아의 블라디보스톡 우스리스크 또 하바롭스크 , 이르쿠츠크 이런 지 다니면서 조사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 네 그렇군요. 지금 교수님께서 연구하시고 계신 내용 중에서 국제 이주와 디아스포라가 있었습니다. 이 디아스포라가 뭔지 한번 짚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이게 이제 제 수업 시간에 하는 내용입니다마는 좀 어렵더라도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디아스포라의 정치 경제라는 과목은 아마 국립대학에 정치외교학과 중에서 전남대학교만 있는 그런 과목입니다.

그래서 이제 그 디아스포라는 어원이 아마 이제 기독교인 분들은 잘 아시겠습니다마는 씨를 뿌리다 이제 흩뿌리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농부가 농사를 짓기 위해서는 이제 밭을 갈고 거기에다 씨앗을 한 줌을 집어서 밭에 뿌리잖아요.
이제 씨앗이 흩어지는 거 이걸 의미하는데 사람을 또 그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사람들이 자기가 태어났던 곳에서 국경을 넘어서 자의든 타의든 다른 나라로 이주하는 흩어지는 거 이것을 이제 '디아스포라' 라고 하고 전쟁을 또 피해서 다른 나라로 가거나 또 포로로 잡혀가는 분들도 보통 우리가 이야기하는 이제 디아스포라로 많이 익숙한 그런 내용들이고 이런 분들은 보통 난민 디아스포라 레퓨지 디아스포라라는 용어를 쓰고 있는데요.
 
그래서 혹시 피난민 들어보셨어요? 우리가 어른들이 6.25 때 피난민~ 피난민하고, 피난민 마을도 있다고 그러는데 그게 피난민이 이제 디아스포라예요. 그래서 피난민들은 대부분이 또 이산가족이거든요. 그래서 가족이 흩어져서 따로따로 사는 거 이런 부분들을 또 디아스포라 라고 하고 그래서 6 25 때 그런 피난민 전쟁이잖아요.
 
또 지금 현재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도 팔레스타인 난민 그렇잖아요. 이분들도 난민 디아스포라고 또 우크라이나에서도 전쟁 때문에 많은 난민들이 발생했고 그중에 이제 고려인 동포들도 우크라이나까지 농사 지으러 갔다가 전쟁이 난 통에 또 최근에 광주까지 오게 됐잖아요.

그런 분들도 우크라이나 고려인 난민 그래서 난민 디아스포라 그래서 여러 유형들이 있습니다마는 지금은 국제 이주 노동자도 포함시키기도 하고 또 국제 결혼하신 분들 유학생들 또 직업을 얻어서 해외로 나가서 근무하신 분들을 포함해서 또 광범위하게 사용하고 있습니다. 좀 어렵지 않나요?
 
* 아니요. 충분히 이해했습니다. 충분히 이해했고요. 고려 이야기는 잠시 뒤에 나눠보기로 하고요. 제가 알기로는 우리 교수님께서 멕시코와 쿠바 등에 거주하는 재해 독립운동가의 후손을 찾는 일도 하시고 그분들이 서훈 받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신 것으로 압니다. 그 공로로 국가보훈처장 표창을 받기도 하셨는데, 처음 어떤 계기로 이런 관련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셨는지 궁금합니다.
 
- 한인 디아스포라를 이제 연구하면서 제가 만든 단어가 있어요. 유대인을 하면 디아스포라의 영문 대문자로 하면 이렇게 Jews  History예요. 일반적으로 학계에서 쓸 때.. 그래서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이미지잖아요. 그래서 코리안 디아스포라도 멀리 고구려 유민부터 하면 천년이 역사가 되거든요.

유대인들이 2천년 역사라고 하지만은... 그래서 코리안 플러스 디아스포라 해서 아마 검색하면 코리아 스포라라는 단어가 나와요. 스포라가 흩어지다 그런 의미인데 코리안 디아스포라를 우리 코리아스포라 라고 하기도 하고 영어로도 코리아스포라 라고 하면 학자들이 이건 코리안 디아스포라라고 다 알아먹더라고요.

코리안 디아스포라들이 이 압록강강 두만강을 건너서 대륙으로 이제 디아스포라 길을 가서 지금의 아까 말씀드렸던 디아스포라 거주하게 되고 또 리턴 하게 되는데 이분들은 여권 없이 사시는 분들이에요. 소위 이제 불법이죠.
 
다른 나라를 건너가는데 요즘 여권을 가지고 가야 되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여러 가지 정치적 경제적 이유 때문에 그렇습니다마는 1903년부터 대한제국 시대에 태평양으로 이제 대륙으로도 동시에 이제 가면서, 또 그중에 일부는 태평양을 건너서 이제 북미 지역으로 이민들이 가게 되는데 이분은 합법적으로 여권을 가지고 가신 분들이세요.

대한제국 외무대신이 찍힌 직인을 가지고 이제 한 장짜리 지금 여권하고 다릅니다. 그때는 집조(執照) 라고 하는데 패스포트를 그걸 가지고 하와이가 제일 첫 번째 이민이었죠. 미국의 사탕수수 농장에 한 8천 명까지 됩니다. 제가 명단을 다 가지고 있고 지금 분석 중에 있는데요.

 
그리고 1953년부터 5년까지 한 8천여 명이 갔고 그중에서 2천 분 정도가 리턴 다시 돌아와요. 적응을 못하고.. 태평양 지역이라서 그래도 비교적 가까우니까 (돌아와요.) 그리고 천 명 정도는 Twice 디아스포라 라고 하는데 재 이주하는 거예요. 다시 이제 본토로 가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하와이에는 한 4천 명 정도 지금이야 미국 한인의 뿌리가 되는 분들이죠. 그래서 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미국 본토에서 쌀 농사를 지으면서 이들이 독립운동 자금이 엄청 되거든요. 상해 임시정부가 수립될 때 재정이 거의 한 7~80%가 미주 동포들의 돈이었어요.

 
그렇게 이제 미주 지역으로 이제 갔었고 딱 한 번 배가 1905년도에 멕시코로 가요. 거기는 3년간 계약 노동 이민이었거든요. (멕시코) 애니깽 농장으로... 하와이는 사탕수수 농장으로 노동 이민이죠. 그러니까 우리도 현재 지금 노동자들 많이 와 계시는데 그때는 노동 이민으로서 그때 대한제국 여권을 가지고 그분들이 갔었고, 이분들이 이제 멕시코에 도착해서 3년 동안 정말 그 더운 땅에서 열심히 일해서 이분들 역시 독립운동 자금을 내게 돼요. 이건 이미 많이 밝혀졌고..(그런데) 멕시코 쿠바에 있는 분들은 거의 못 돌아와요.
 
귀환을 하지 못하고 또 너무 멀고 또 경제적으로 돌아올 수 있는 뱃값도 없고 이제 그래서 이제 (우리나라와 거리가 상대적적으로 가까웠던) 하와이와는 다르게...(그리고) 그들이 이제 멕시코에서 쿠바에 살면서도 월급을 5달러 6달러 받으면 거의 3달러 4달러 대부분을 또 독립운동 자금으로 그래서 이분들이 한 10가지가 넘는 명목의 독립운동 자금을 내시거든요.
 
 


그래서 그 정도로 알고 있었고 그 다음에 저는 광주학생독립운동에 대한 연구를 거의 20년째 하고 있는데 국내 지역도 했었고 북한 지역도 했었고 그다음에 이제 중국 일본 러시아까지 했었거든요.

그래서 15, 16년도에 미국에 1년 동안 가 있으면서 북미 지역에서 광주학생독립운동 지지 후원금 모금 이런 부분을 연구하면서 미국의 워싱턴포스트라거나 뉴욕타임즈 그런 기사들도 봤었고 그런데 그런 기사가 나오는 과정에서 한인.. 하와이라거나 미국 본토에 있는 한인 디아스포라들이 다 돈을 냈더라고요. 일제의 잔악성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서는 정말 메이저 신문인 뉴욕타임스, 워싱턴 포스트에 나와야 된다는 (취지로 진행된)  그런 자료를 봤었고 그걸 자료를 찾아보니까 멕시코와 쿠바에서도 한인들이 돈을 냈다는 게 나와요.
 

 
광주학생독립운동 때 그래서 그럼 뉴욕에서는 이제 쿠바가 가까우니까 (그리고) 그때 있을 때 딱 (멕시코와 대한민국이)수교가 됐어요. 오바마 정권 때 그래서 (제가 있던 곳과) 한 3시간 거리라서 쿠바를 갔었고 가기 전에 광주학생독립운동을 후원했던 (당시 멕시코 거주 한인) 명단을 보니까 13분이 보훈처에 등록돼 있고 서훈 추서가 됐더라고요.

그래서 그 명단 가지고 이제 쿠바를 갔었죠. 가서 이제 후손들 가서 이제 보니까... (관련 후손) 사람을 만나는데 할아버지 이름을 몰라요. 보훈처에는 분명히 이름이 있는데 그리고 당신 할아버지가 이러이런 공로로 대한민국 정부가 훈장을 추서를 했다(고 하면) 전혀 몰라요. 나한테 거짓말하지 마시오 그래요.

(이거 아닌데) 그래서 이제 그 인적사항이라거나 그런 내용들을 설명해 주고 그 무엇이 문제인가 보니까 보훈처가 발표만 하고 후손들한테 알리지 않은 거예요.
 
* 너무 멀어서..?
 
- 그렇죠 또 (그곳) 후손들은 스페인어를 쓰고 있고 한국어를 모르고 소통이 안 됐던 것이죠. 4세 5세 나왔기 때문에 자기 할아버지 증조 할아버지에 대한 이름도 모르고 기억이 안 되는 겁니다. 이게 13분의 명단 중에서 이제 딱 한 분만 전수가 됐더라고요. 임천택 선생 아주 유명한 분이신데.. 그래서 (임천택 선생을 제외하고 나머지) 12분을 내가 찾아드리면 안 될까 생각을 했었죠.
 
*제가 인터뷰를 하기 앞서서 교수님께서 말씀해 주시기를 쿠바 멕시코보다 더 찾기가 힘든 게 고려인들의 독립운동가 후손 찾기다~ 이렇게 말씀해 주셨어요. 그 이유를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미국이나 멕시코 쿠바는 구심점이 되는 대한인국민회라는 조직이 있어서 거기에 거의 매주 보고를 했어요. 또 독립운동 자금 내면 이걸 이제 기록을 했었고 그래서 그게 보관이 됐죠. 그리고 이거 영수증을 따로 주는 게 아니라 신문에다 내면 돼요.

 
그래서 쿠바 마탄자스에서 김세원 2원, 박창훈 10원 박창훈이라는 분은 돈을 많이 벌어가지고 다른 사람이 1달러를 할 때 10달러 100달러 했던 분이거든요. 그 기록이 매주 나와요. 신문이 배달이 되고 이제 이게 그래서 그런 기록이 있고 그다음에 거기가 이제 생노병사 희로애락이 다 들어 있어요.

우리 신문도 여러 이제 섹션별로 있듯이 그래서 누가 이제 아기가 태어나도 그 기록을 신문에 나와요. 누가 출산했다..생산했다.. 당시엔 그래 나오는데 그다음에 누가 죽었다 그런 기사도 나오고 그다음에 이제 누구누구가 김세원이 회갑 했는데 장자 큰아들이 초빙을 해서 성대하게 잔치를 했다 그런 정보도 나오고..
 
* 고려인들은 그런 게 기록이 거의 없나요?
 
- 있죠. (그런데) 그렇게까지 자세히 (러시아가) 사회주의국가라 많지는 않고요.
 
(다시 멕시코 이야기로 돌아와서) 이제 그렇게 주로 독립운동에 대한 것도 있고 그다음에 가족 관계를 파악을 못 하는데... (멕시코) 신문을 보면 아들 이름이 나오고 사위도 나오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걸 다 찾을 수 있는데...
 
고려인들은 규모도 많잖아요. 멕시코 쿠바는 천 명도 안 됐기 때문에 그게 가능했는데
 
* (멕시코와 러시아 한인들의) 규모라 다르네요?
 
-네, (러시아는) 거의 30만 명이라 핵심적인  그런 분들에 대한 정보들은 많이 실려 있는데.. 그렇잖아요. 하루에 사건이 30만 명이면 수천 건이 터지는데 신문에 나온 것은 딱 지면 한계상 보도되기가 한계가 많잖아요.
 
그래서 조그마한 사소한 것도 쿠바 멕시코는 많이 나와 있는데 (러시아의 경우) 그런 정보들이 많지가 않고 그다음에 강제 이주를 당했잖아요. 그러면서 거의 1860년이라 하면은 한 70년 동안 이제 오래된 사람들은 70년 동안 살았으면 아예 정착했어요. 두 세대가 (지나) 갔잖아요.
 
1900년에 갔더라도 37년이니까 한 세대 정도 되고 그 정도만 돼도 땅이 있고 거기에 뿌리를 내렸죠. 디아스포라들이 뿌리내리기가 힘든데 한 세대 두 세대가 되면 원 사이클 되면 그게 뿌리를 박거든요. 이제 그렇게 이제 됐는데 그분들의 그런 많은 자료들이 강제이주 당할 때 다 가지고 가지 못하잖아요.

일주일 내에 짐 싸서 역으로 집합하라는데 진짜 필요한 (것만 챙기게 되어있죠.) 그리고 고려인들은 또 그 씨앗은 가지고 왔더라고요. 농사를 지어왔기 때문에 그래서 중앙아시아에 벼농사 짓는 곳은 고려인들이 사는 곳이에요. 원래 면화 같은 거 많이 지었던 지역들인데 ... 그리고 정말 필요한 것 그리고 어떤 집은 우리 전쟁 때도 6 25 때도 족보를 가지고 그것만 꼭 가지고 왔다 하더라고요. 남한에 올 때도... 근데 거기서도 어떤 분은... 지금 (고려인) 한두 분 만났는데, 족보를 광주 이씨 족보를 가지고 왔대요.
 
*그래서 이번에 고려인 독립운동가 후손 찾는 데도 이 족보와 종친회가 좀 도움이 되고 있다면서요?
 
- 그렇죠. 진짜 뿌리를 아는 사람들은 먹는 거 그런 거 가져온 것보다 족보를 가지고 간대요. 이게 자기 뿌리 역사 이런 게 우리의 유교적인 그런 전통이 오래됐기 때문에.. (하지만) 그런 분들은 많지가 않죠.

아마 18만 명 중에서 족보를 가지고 가신 분들이 몇 분이나 계실까 또 가지고 가서도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이건 봉건적인 거라 해가지고 아마 다 불질러버리고 없었는데.. 중국 동포들도 그런 분도 계시더라고요. 문화대혁명 때 막 그런 걸 없애버렸는데.. 그래서 하여튼 아주 일부는 그래도 그런 자료들 또 있고 일부는 그런 족보라거나 이제 그런 사진이라거나 또 그 묘소에 대한 것들.

 
그래서 할아버지 묘는 우수리스크에 있고 할머니는 또 강제이주 당해가지고 우즈베스탄에 있고 또 자기 아버지는 또 카자스탄에 있고 손자 손녀는 한국에 있고 이게 완전히 디아스포라예요. 비극이 디아스포라죠. 한 곳에서 태어나서 살아가면 좋은데 최소한 5개 나라의 자기 선대들이 흩어져 있는 비극의 디아스포라고 그러죠.

 
고려인들이 이제 이동하고 이동하다 보니까 그런 기록이라거나 이런 게 거의 없어요. 자기 가족을 증명할 수 있는 자기 선대들이 무엇을 했는가...그게 이제 북미 지역하고 많은 차이점이 있죠.
 
*고려인 1세는 우리나라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시간이 지나서 2세 3세 이렇게 되었는데요. 고려인 이주 160주년을 맞이해서 우리 사회에 당부하고 싶은 말씀이나 추가로 전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면 말씀해 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 처음에 제가 그 디아스포라를 이야기하면서 농부가 씨를 뿌리는 거 흩어지는 거 흩뿌리는 것 아마 자기 텃밭이라도 하신 분들은 그걸 경험할 거예요. 씨를 뿌린다는 게 이제 성경에도 나오는데 씨앗이 어느 땅에 떨어지냐 문제예요.

농사를 지어본 분들은 이제 그 씨앗이 싹을 틔우고 이게 뿌리를 박고 줄기가 나고 꽃이 피는 이게 한 사이클인데 그다음에 이제 수정을 해서 열매를 맺는 이 과정에서 제일 중요한 게 이제 뭘까요? 땅일까요?
 
*씨앗..?
 
-유전자 다 중요해요. 고려인 동포들은 한국에 떨어진 씨앗이에요. 돌고 돌고 돌아가지고 이제 길게는 160년 만에 돌아온 그 씨앗이 이제 싹 틔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물과 기름진 땅과 햇볕과 기온 바람 이런 것들이 잘 되었을 때 이 씨앗이 이제 진짜 뿌리를 봤거든요. 근데 아직은 뿌리를 박지는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이제 결국은 한국의 법과 제도죠.
 
이게 또 교육 환경들이고 또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같이 살아가고 있는 이제 이주자들에 대해서 같이 살아가는 한국 사람들의 그런 관용이라 할까 이런 것들이 합쳐졌을 때 이분들이 이제 어려운 상황에서 살다가 한국에 왔을 때 뿌리내리고 우리의  같은 동포로 살아가는 그런 것들이고 중요해요.
 
 

* 끝으로 김재기 교수님을 도와서 고려인 뿌리 찾기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는 학생 한 분을 더 만나보겠습니다.
네 반갑습니다.

 
 
-네, 안녕하세요. 저는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 24학번 박서영입니다. 최종적으로는 어떤 결과물을 낼지는 아직 미지수긴 한데 그래도 한 역사 그 가정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만큼 저도 그들과 좀 더 가까워지는 시간이 되는 것 같습니다.

일단 저는 고려인 친구 한 명을 만들고 싶고요. 그리고 결과적으로 뚜렷하게 보이는 이미지가 있으면 좋을 것 같으니까 그분들의 약간 사업 만화 이런 식으로 이미지가 투영될 수 있는 결과물을 내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 사컷 만화 이런 재주도 있나 봐요?
 
- 그냥 관심 있는 거지... 아직은~ 아직~ 어떻게 될지는 모릅니다.
 
*시작이 반이고 겨자씨 같은 씨앗이 나무로 크니깐요. 응원하겠습니다.
 
- 감사합니다.
 
* 네 지금까지 고려인들의 뿌리 찾기를 돕고 있는 전남대학교 김재기 교수팀을 만나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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